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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부흥으로 민족의 동반자가 되게 하소서”
-거룩한 교회 민족의 동반자-
김치성 목사(총회교육자원부 총무,Ph,D)

Ⅰ. 들어가는 말


2019년은 일제가 군사강점 속에서 우리 민족의 전반적인 생활에 대하여 억압과 수탈하던 시기에 민족적으로 항거하며 3.1 독립운동을 벌인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앞으로도 3.1 독립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계승정신 운동은 계속될 터이지만 ‘3.1운동 100주년’이라는 해는 올해가 지나면 더 이상 앞으로의 역사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3.1운동 100주년에 즈음하여 그 때의 그 정신과 운동이 교회의 부흥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에 대하여 논의하는 것은 참으로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다.
더우기 우리 총회는 103회기의 목회 주제를 "영적 부흥으로 민족의 동반자 되게 하소서"(히13:12-16, 합3:2)로 정하여 3.1운동 100주년을 즈음하여서 그 둘의 관계에 대하여 더욱 관심을 갖게 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정체 및 쇠잔하여 가는 현실 교회의 모습에서 더욱 부흥을 갈망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갈망함은 3.1운동 백주년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우리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3.1운동 100주년에 지금 한국교회는 어떠한가?”, “지금 우리는 100년 전 전 겨레가 보았던 그 모습을 지니고 있는가?”, “100년 전 한국교회의 모습은 어떠하였을까?”,“100년전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교육을 해야할까” 등의 질문이며 필자는 이에 답하는 글을 전개하여 나가고자 한다.

II. 3.1운동 백주년에 즈음한 한국교회의 현실

1.세속화 사회

지금 우리사회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종교를 거부하는 세속사회로 치닫고 있다. 통계청 자료를 조선일보가 분석한 바를 옮겨 본다. “우리나라에서 종교가 있는 국민은 43.9%, 없는 국민은 56.1%였다. 1995년부터 10년 주기로 실시된 이 조사에서 종교가 없다고 답한 비율이 처음으로 절반을 넘었다. 전체 조사 대상자 중에서 개신교를 믿는다는 사람이 19.7%(967만명)였고, 불교를 믿는다는 사람은 15.5%(761만명)로 나타났다. 천주교는 7.9%(389만명)였다. 종교가 있다고 답한 국민의 98.3%가 이 세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답했다.” 이러한 산술적 수치는 지금 우리 사회가 ‘세속사회’,‘탈종교사회’로 줄달음 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국민의 56%가 종교가 없고 이 숫자가 점차 확장되기 때문이다.
2004년 2014년
19~29세 45 31
30대 49 38
40대 57 51
50대 62 60
60대 이상 68

표1) 연령별 종교인 비율 (%)

위의 도표는 한국갤럽이 2004년과 2014년 종교현황을 비교 조사 발표한 내용인데 이 표에 의하면 연령대가 낮을수록 2004년에 비하여 종교인 비율이 현저히 낮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2.교세의 감소 현상

이러한 세속사회의 출현과 더불어 각 교단 내의 교세통계를 보면 참으로 침울하기 그지 없다. 이만식 교수는 다음과 같이 우리나라 주요 교단의 교인 수를 조사하였는데 이를 살피어 본다.
예장합동 예장통합 감리회 예장고신 기장 예장합신 합계
2007 2,912,476 2,686,812 1,534,504 474,047 337,570 147,415 8,092,824
2008 2,896,967 2,699,419 1,557,509 464,799 327,903 150,241 8,096,838
2009 2,936,977 2,802,576 1,563,993 464,515 317,886 151,507 8,237,454
2010 2,953,116 2,852,311 1,587,385 466,379 311,212 156,508 8,326,911
2011 2,988,553 2,852,125 1,586,063 482,488 305,953 153,361 8,368,543
2012 2,994,873 2,810,531 1,585,503 481,032 297,752 154,709 8,324,400
2013 2,857,065 2,808,912 1,557,692 472,717 289,854 152,316 8,138,556
2014 2,721,427 2,810,754 1,486,215 461,476 284,160 149,969 7,914,001
2015 2,700,977 2,789,102 1,468,442 472,014 264,990 147,256 7,842,781
2016 2,764,428 2,730,900 1,397,918 473,497 240,109 151,516 7,758,368

표2 ) 2007~2016년 주요 교단별 교인 수 추이
이 통계를 보면 우리 교단은 2010년도에 가장 많은 숫자인 2,852,311명을 보이고 있으며 기독교 전체적으로 가장 많이 모였던 시기는 2011년의 8,368,543명이다. 물론 이 조사는 모든 기독교단을 조사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주요교단의 통계조사수치이다. 그러나 기독교 전체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그리고 이 통계가 보여주는 결론은 각 교단마다 차이는 있지만 2011년을 정점으로 하여 모이는 숫자가 점차 감소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3. 다음세대의 급격한 감소현상

기성 종교인들의 숫자를 보면 종교인 전체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고 한국 최대의 종교인 기독교인 조차 그 숫자가 점차 줄어들고 있어 우리나라는 점차 세속주의로 흘러가고 있음을 보았다. 그렇다면 우리의 다음세대들은 과연 어떠할까? 지금 우리는 누구나 인지하고 있는 극단적인 저출산의 현상을 경험하고 있기에 일반종교 및 기독교도 상황은 그리 밝지 않은 모습이다. 이만식 교수는 한국 기독교의 대표교단인 우리 예장 통합의 통계보고를 정리하였는데 이 표에 의하면 2007년 이래 우리 교단 다음세대 숫자는 계속적으로 줄어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연도 영아부 유아부 유치부 유년부 초등부 소년부 중고등부 합계
2007 16,655 23,025 75,136 79,532 85,580 106,015 193,215 579,158
2008 17,737 23,184 74,751 74,223 83,783 104,897 193,344 571,919
2009 17,297 22,956 72,184 69,924 80,056 100,520 195,275 558,212
2010 18,305 24,571 67,378 64,232 74,327 89,900 188,304 527,017
2011 21,429 24,130 64,731 58,419 69,015 83,266 180,308 501,298
2012 18,733 23,641 62,251 56,519 64,175 76,090 171,660 473,069
2013 17,101 21,555 58,293 50,840 59,423 68,175 157,409 432,796
2014 17,523 23,323 57,649 51,112 57,880 64,637 152,327 424,451
2015 17,325 22,659 55,435 48,110 55,317 62,358 146,763 407,967
2016 16,403 22,109 52,053 46,020 54,173 56,147 134,904 381,809

표3) 2007~2016년 예장 통합 교회학교 학생 수 추이
이 표 분석은 김치성이 그 이전의 4년을 조사한 것과 같은 흐름을 보여준다. 김치성의 조사와 이만식의 조사에 의하면 2003년 이해 가장 교회학교의 수치가 높은 해는 2005년도이다. 이후부터는 계속적인 숫자의 하강이 있어왔음을 볼 수 있다


표4 ) 예장통합 교회학교 학생수(단위:명)
이러한 통계는 분명 우리를 침울하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에 위로를 주는 통계를 소개하여 본다. 처음에 살펴본 조선일보의 통계청 ‘2015년 인구주택 총조사’ 분석에 의하면 2005년과 2015년 사이의 종교인구 변화는 무종교가 47.1%(2182만6000명)에서 56.1%(2749만 9000명)으로 불교는 22.8%(1058만8000명)에서 15.5%(761만 9000명)으로 기독교는 18.2% (844만 6000명)에서 19.7%(967만 6000명)으로 천주교는 10.8%(501만 5000명)에서 7.9%(389만명)으로 되어 계속 1위를 지켰던 불교가 2위로 내려앉고, 쭉 2위였던 개신교가 1위로 올라역전된 대목이 가장 눈에 띈다고 하였다.” 이러한 2015년 통계청의 인구주택 총조사 분석은 분명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자긍심과 자랑스러움을 주었다. 아울러 이를 계속적으로 선순환구조로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하여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그 시절의 우리 기독교회를 살피어 보며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III. 부흥과 3.1운동 당시 교회의 모습

3. 1운동은 이제 2019년이면 100주년이 된다. 이 운동은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나서 약 1년간 총 1만 5천회의 만세시위와 연인원 1천만명이 참가하였다. 이 운동은 남녀노소가 같이 참여하였고, 다중다발적이었으며 임시정부 수립운동과 해외에서의 외교활동 등 다양하게 나타났다. 이 3.1 운동은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민족적으로, 우리 기독교의 입장에서 우리의 자부심과 우리의 정체성을 가장 강하게 드러낸 너무나도 가슴 아프지만 또한 자랑스러운 사건이었다. 가슴 아프다는 것은 엄청난 사람들의 사상 사건과 구금, 고문 등으로 고통 속에서 개인의 인생이 망가지고 생을 마감지어야 했기 때문이고, 자랑스럽다는 것은 그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우리의 자주성을 전 세계에 알렸기 때문이다. 특히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명중 16명이 기독교 성직자이거나 기독교인이라는 점은 우리 기독교가 35년 정도의 짧은 역사의 종교였지만 3.1운동 당시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랑스러운 대목이다. 송길섭은 당시 우리나라 인구가 2000만 정도로 추산되었고 우리 기독교는 개신교와 천주교를 다 합하여 3,252개 교회와 20-30만명 정도의 교인이었다고 한다. 전체 인구 대비 비율로 보면 기독교는 우리나라 인구 중에서 대략 1~1.5% 정도의 교세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조선총독부의 통계에서는 2,883개 교회에 355,114명으로 파악되고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 천도교의 교세가 300만이나 되었던 것에 비하면 기독교는 수적으로 매우 약세였다. 최재건은 3.1운동에서 다른 종교의 역할도 컷지만 기독교회가 참여하지 않았다면 3.1운동은 일어날 수 없었다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소수 집단인 기독교가 3.1 운동의 중심에 설 수 있었을까?
1. 연대감의 리더십으로 민족의 동반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주도적으로 3.1 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강한 연대감을 보여 주며 조직화되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한국교회 자체의 확장과 전국적 조직을 들 수 있다. 한국교회의 세 확장은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기점으로 기하급수적으로 급팽창하게 되었다. 학자들은 이 운동에 대하여 몇 가지로 성격과 그 의미를 규정하고 있다. 첫째로는 기독교의 순수하고 핵심적인 신앙의 내용을 한국 기독교에 뿌리를 내리게 한 운동임을 손꼽는다. 성령의 역사와 죄에 대한 고백,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한국교회가 체험적인 이해를 하게 되었다. 둘째로는 이 전에는 선교사들이 한국인을 열등하게 보면서 백인우월의식을 갖고 있었지만 성령의 임재하심을 같이 경험하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함께 자복하면서 양쪽 간에 축적되었던 위화감과 앙금이 사라지게 되었다. 셋째로는 부흥운동을 통하여 한국교회와 교인의 도덕성 향상에 크게 기여하였다. 교우 개인들이 자신들의 죄에 대하여 고백하며 신앙을 보다 깨끗하고 순수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는 이 운동을 통하여 한국교회는 더더욱 성경공부와 기도를 더욱 열심히 하게 되어 한국교인은 모이기만 하면 기도하기를 힘쓰게 되었다. 그러나 평양에서 치솟았던 대부흥 운동이 열기가 해를 넘기면서 급속히 식어가자 일군의 선교사들이 부흥운동의 열기를 되살려 보고자 하였다. 1909년 여름 스톡스(M.B.Stokes) 목사 등 개성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남감리회 소속 선교사 3인이 모임을 갖고 1주일간의 수련회에서 기도회를 갖고 이 후 스톡스는 지방 전도여행에 나섰다. 그는 전도여행에 앞서 교인들에게 1년 안에 5만명의 신자가 늘어날 수 있도록 기도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이것이 백만명 구령운동의 발단이 되었다. 이렇듯 한국교회는 신앙의 본질에 충실을 기하면서 서서히 그 규모를 확장시켜 나갔다.
두 번째로 규모의 확장과 더불어 교회의 전국 조직화이다. 교회의 부흥에도 불구하고 3.1운동 당시 절대적인 숫자의 교세는 여전히 미약하였다. 그러나 기독교회는 이 어간에 전국적인 조직 공동체를 이루었던 대표적인 집단이었다. 이에 대하여 최재건은 장로교는 1907년 평양신학교에서 제 1회 졸업생 7명을 목사로 배출하였고 이내 독노회를 세웠으며 1912년에 독노회 산하의 대리회들을 7노회로 개편하고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구성하게 되었다고 하며 3.1운동에서의 교회의 전국조직화를 주요 요인으로 꼽고 있다. 또한 그는 북감리회와 남감리회는 1930년 합쳐질 때까지 외형적으로는 분리되어 있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초창기부터 화합및 협력하였다고 하며 한국교회는 장로교 감리교 교회들을 선두로 하여 정부 기구를 제외한 조직 공동체로서는 가장 크고 잘 연결된 기구를 형성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장로교회 조직과 감리교회 조직은 3.1운동에 절대적인 공헌을 한 공조직이었다.
세 번째로 당시 한국기독교는 해외에서 온 선교사들의 본국과 해외에 나가있는 교회인물들과 세계적 연대감을 이루고 있었다. 특별히 해외 한인 기독교인들의 활동에 대하여 이치만 교수는 밝히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해외에 나가있었던 구한말 주요 기독교인들은 전세계에 흩어져서 강한 연대감 속에서 여러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나갔었다. 평양신학교를 중퇴하고 장로교회에서 전도사를 지낸바 있는 여운형은 중국상해에서 1918년 8월에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재미 기독교인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로 인하여 미국 내 약소민족의 독립열기가 더해갈 때 비록 일제의 반대로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대한인국민회(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의 중앙본부장 안창호는 이승만, 정한경, 민찬호 목사를 뉴욕의 약소국 동맹회의와 파리강화회의의 한국대표로 파견 결정하였다. 일본에서의 독립운동은 ‘조선기독교 청년회’와 ‘조선유학생 학우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이들은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웅변대회를 가지면서 후에 독립선언서 작성, 선포하고 이를 일본정부와 각국 대,공사관에 송부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몇 가지의 요소는 3.1운동이 전국적으로 들풀처럼 일어나게 하는 기본적인 인프라 구축이었던 것이며 전국적이고 전 세계적인 독립운동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2. 희망을 주는 종교로써 민족의 동반자였기 때문이었다.
기독교가 3.1 운동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구한 말 아직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 있어서 외세를 맞이할 준비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였지만 이 나라는 자주화와 개화를 동시에 추진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의 조선의 개화파 지식인들은 기독교를 통하여 자주화와 개화를 동시에 추진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그대로 현실화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1880년대의 구한말 개화파는 자신들의 사상은 여전히 전통적인 가치관인 유교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이용후생, 부국강병의 실사구시'를 위하여 기독교를 수용할 것을 강하게 요청하였고, 기독교를 믿음으로써 개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였고 이를 희망하였다. 개화파의 지식인과 달리 일반 평민들은 또 다른 면에서 기독교를 희망의 종교로 인식하였다. 즉 기독교는 평등의 개념을 가르쳐준 평등의 종교라고 평민들은 인식하였다. 그러기에 당시 유교적인 신분 윤리에 젖어있던 민중들에게는 만민평등의 사상과 권리는 혁신적인 복음이었다. 이렇게 개화파의 지식인과 일반 평민들의 호응 속에서 초기의 미국 선교사들은 청교도 정신으로 우상의 타파, 성서주의, 안식일 성수, 절제와 근면, 금주 금연, 일부일처제 등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종교규범과 생활양식을 준수한 신자된 사람은 그야말로 놀랄만큼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났으며 기독교는 지식인이나 평민들에게 희망의 종교로 다가서게 되었다.
이렇듯 기독교는 개화파의 개화의 요구와 민중의 평등사상을 고취시켰는데 이를 가능케 한 것이 바로 교육과 의료선교였다고 이만열은 밝힌다. 1885년 4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입국한 이래 선교사들은 조선이 원하던 교육과 의료부분에서부터 선교를 시작하였다. 이는 무지를 계몽하여 새로운 세계를 밝혀 주는 것이 바로 선교의 첩경이라고 보았기 때문이고 당시 조선 사람들은 교육을 통해 국력의 부강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책에 따라 병원을 설립하였고,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였다. 배재, 이화 경신 정신 배화 숭실 숭의 등의 학교들이 연이어 설립되었다.
이렇게 기독교는 생활양식을 새롭게 하고 인격적 변화를 일으키고 병원과 학교 설립으로 계몽운동을 펼치면서 한걸음 더 나아가게 되었다. 기독교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혁신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당시 사람들은 기독교의 새로운 윤리는 한국사회와 정치를 새롭게 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1907년 양기탁, 안창호, 이승훈 등이 기독교 신자 중심의 비밀 정치 단체를 조직할 때에도 국민을 새롭게 한다는 뜻에서 그 이름을 '신민회'라 불렀던 것이다. 이 신민회는 후일에 일제가 기독교의 힘을 제어하기 위하여 105인 사건을 꾸며내 탄압하여 해산되었다. 이렇게 조선의 지식인과 민중과 독립운동가들에게 기독교는 새롭게 하는 원동력이었고, 희망이었다. 그리하여 기독교인들은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되었고 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하고 민족적 고난을 함께 감당하는 민족 종교로서 근대사에 뿌리를 내리게 하였다. 이는 자연스럽게 일제가 한반도를 침략하는 데에 기독교가 가장 거추장스런 집단으로 인식받게 된 요인이 되기도 한다.
3. 고난에 동참하는 민족의 동반자였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조선에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전에 조선은 외부에 서서히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일제의 무력시위로 인하여 강제적으로 조일수호통상조규를 체결하며 문호를 개방하였고, 1882년에는 미국과 조미조약을 맺었다. 이 후에 미국의 주요 개신교 교단 해외 선교부에서 조선에 대한 선교를 시작하였다. 이러한 문호개방 속에서 조선 사회는 급변하게 되었다. 구한 말 이 변화의 한 복판에서 일제는 청일전쟁(1894)을 일으켜 승리하였고, 러일전쟁(1904-1905)에서도 승리하였다. 이후에 을사보호조약(1905년 11월)에 이어 1910년에 조선을 강제로 병탄하였고 조선총독부를 통해 식민정치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일본 조선총독부에게는 군사적 강점의 과정에서 하나의 당면 과제가 생기게 되었다. 최재건은 반일 세력의 중심으로 우뚝 선 기독교를 제압하는 일이 총독부의 당면과제였다고 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교회는 1907년 평양에서 시작된 대부흥운동을 기점으로 또 100만인 구령운동으로 그 세와 조직을 날로 키워가면서 전국조직화 하고 동시에 선교사들과 해외 조선 기독교인들과의 연계로 일제강점에 대한 국제적 비난 여론을 증폭시켰다. 아울러 교회 안에서는 항일, 독립과 사회의 도덕증진을 지향하는 분위기를 팽창시키고 이로 인한 구국기도운동, 청년회 활동, 계몽운동, 무장투쟁이 교인에 의해 연이어 일어나게 하였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제는 기독교를 제압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일제는 105인 사건을 조작하기에 이르렀다. 선교사들과 교인들이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기 위한음모를 꾸몄다는 거짓구실로 신민회 중심의 기독교 세력을 제거하였다.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1911년에는 조선교육령을 통하여 대부분이 기독교계 학교였던 사립학교들을 제재하였고, 1913년에는 정령 100호를 통해 선교사들의 의료활동을 억압하였다. 1915년에는 '포교규칙'을 통하여 목회자에게 자격증을 받게하고 예배당 설립시에는 총독부의 허가를 받도록 하였다. 그리고 목사의 설교는 항상 요시찰 대상이었다. 1915년에는 교육과 종교의 분리정책이 담긴 개정사립학교법 제정하여 기독교 사립학교 내에서 성경과목과 채플을 정규교과과정에서 제외시켰다. 이같은 일제의 규제로 인하여 기독교학교는 점차 줄어들게 되었는데 조선말에 829개에서 1918년 말에는 323개교로 또한 1919년 5월말에는 298개교가 남게 되었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하여 한반도의 땅을 약탈하였고, 회사령을 통해 경제생활을 통제하였으며 사법처우와 행정기관의 극심한 차별대우 속에서 언론 집회 결사 자유도 박탈하였다.
이러한 복합적인 상황에서 1919년 3월1일에 독립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과정은 당시 300만명 정도의 신도수를 지닌 천도교와 20-30만 명에 불과 기독교가 각각 독립운동을 준비하였지만 이내 거국적으로 협력하기로 하였다. 기독교 내에서는 장로교는 주로 서북지역을 담당하였고 감리교는 주로 서울 지역을 담당하였다.
이렇게 3.1 운동이 시작되었지만 그 후의 피해는 어마어마하였다. 당시 그 구체적인 통계수치는 대부분 은폐되거나 축소되었지만 여러 조사 및 보고서를 통하여 당시 피해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조선총독부는 사망 7,500여명, 부상 16000여명, 체포 46,000여명, 공소 19,054명, 유죄판결 7816명이라고 밝혔다. 이 가운데서 특별히 교회의 피해는 심각하였다. 완전 파괴된 교회 17개소(장로교 12개), 부분파괴 24개소였다. 제암리교회에서는 30여명이 불에 타 죽었고, 평남 강서 사천에서는 2000여명의 시위대 중에서 11명이 죽었고, 원산에서는 43명이 즉사하였으며 20여명의 중상자들이 나왔다.
우리 장로교회의 피해 상황은 제 8회 총회보고서 부록에 있는 각 노회상황 보고에 상세히 기술되었다. 체포 3,804명, 체포된 목사와 장로 134명, 체포된 조사와 지도자 202명, 체포된 남신도 2,125명, 체포된 여신도 531명, 태형 후 석방 2,162명, 총에 의한 사살 41명, 참살 6명, 수감중 1,642명, 파괴된 교회 12개소였다.
이러한 참담한 피해 속에서 한국기독교회는 3.1운동을 통하여 오히려 큰 것을 얻게 되었다.당시 기독교인들이 주류 종교였던 불교나 유교인들 보다 교인 숫자는 적었지만 주도적으로 항일 독립운동을 이끌었고 참여함으로써 기독교는 수입된 서양 종교라는 편견을 극복할 수 있었고 민족과 함께하는 종교로 인식되었다.
정리하여 보면 구한말 한반도의 지식인과 일반 평민들에게 희망으로 다가온 기독교는 순수신앙을 통해 세를 불리게 되었고 전국 조직망을 갖추게 되었다. 교회의 전국 조직망은 3.1운동이 기독교 학교와 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전국에 확산되는 통로의 역할을 하였다. 특히 해외의 한인교회를 통해서도 유기적인 대외연락체계가 가동되어 외국에서의 항일독립운동 소식이 곧바로 본국에 연락될 수 있었다. 이는 국내에서 3.1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게 한 원동력이고 교회는 민족의 문제에 깊게 동참함으로 고난의 십자가를 짊어지었다.

IV. 교육적 적용

3.1운동 백주년을 맞이하며 100년전의 기독교의 모습을 보면 그 때 그 시절의 한국교회는 우리 한국교회의 부흥을 위한 하나의 원리와 교과서 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100년이나 지난 교회의 모습이지만 여전히 그 때의 모습과 마음가짐으로 선교에 임한다면 앞으로도 여전히 교회는 부흥이 될 것이라 분명히 믿는다. 필자는 이 모습을 찾기 위한 일환으로 하나의 해석학을 제시하고자 한다. 토마스 그룸(Thomas Groome)은 그의 저서에서 교육학적 해석학을 소개하고 있다. 그룸의 해석학은 ‘몫을 나누어 참여하는 실천(Shared Praxis) 이론’이라고 하는데 5단계가 제시된다. 1단계는 현재의 행동에 대한 자각단계이다. 2단계는 학습 참여자들의 이야기와 비전들에 대한 비평적 성찰의 단계이다. 3단계는 기독교 공동체의 이야기와 비전을 듣는 단계이다. 4단계는 기독교 이야기와 일반 이야기 사이의 변증법적인 해석을 하는 단계이다. 마지막 5단계는 참가자들의 이야기와 비전에 기독교 이야기와 비전을 접목시키는 변증법적인 해석의 단계이다. 그러나 이 5단계는 길게 느껴져서 필자는 토마스 그룸의 5단계 교육적 해석학을 다음과 같이 3단계로 변환시켜 이 글에 적용시켜 보려한다: (1)비평적 성찰의 단계 (2) 기독교 이야기와 비젼의 탐구 단계 (3) 변증법적 해석과 적용의 단계이다.
첫째로 ‘비평적 성찰단계’는 지금 우리의 모습에 대하여 비평적 성찰을 하는 단계이다. 즉 우리는 민족의 동반자가 되고 있는지? 우리는 지금 민족적으로 희망의 모습으로 비취어지고 있는지? 지금 우리는 민족의 어려운 문제와 짐을 같이 지고 동참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민족의 어려운 짐과 고난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 등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살펴보는 단계이다. 둘째로 ‘기독교 이야기와 비젼의 탐구 단계’에서는 성경이나 교회사 등에서 교회가 민족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당한 모습을 살펴보게 하는 단계이다. 3.1운동 당시 교회의 모습을 이야기하여 주고 설명하여 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고, 에스더가 민족을 위하여 ‘죽으면 죽으리라’고 이야기 한 사건 등을 성경에서 찾아 들려주는 단계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변증법적 해석과 적용의 단계’에서는 앞서서 들은 기독교의 이야기와 비젼 등을 오늘 우리에게 변증법적으로 해석하여 적용하는 마지막 단계이다. 이를 한마디로 한다면 적용이다. 그런만치 추상적인 얘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나와 우리의 신앙공동체에서 나라와 민족앞에서 빛과 소금이 되고 이 사회에서 좋은 이미지를 던져 줄 수 있는 것을 어떻게 실행할 수 있을까에 대하여 깊은 논의를 하며 이를 실생활에 적용시키는 단계이다.

V. 나가는 글

2019년은 3.1운동 백주년이 되는 해이다. 뜻 깊은 해를 맞이하면서 100년 전의 한국교회의 모습을 살피어 보며 이를 오늘 우리에게 적용시키면서 또 다른 교회의 부흥을 희망하여 보았다. 100년 전 당시 교회는 ‘민족의 동반자’였다. 공적 기관의 모습을 갖춘 커다란 지도력을 지닌 동반자였고, 희망의 동반자였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민족의 고난에 동참을 하여 엄청난 피해를 입은 동반자였다. 이러한 동반자의 모습이 있었기에 교회는 더욱 부흥할 수 있었고, 외래 종교라고 평가 절하되었던 모습에서 민족 종교로 뿌릴 내리며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었다. 이제 그러한 교회를 다시 꿈꾸어 본다.
준비중입니다.